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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살다보니

2018년 겨울, 중학교 2학년. 나는 머리를 잘랐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도 않지만 그때 나는 머리 자르는 것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머리를 투블럭으로 자르고, 파마를 했다. 내가 머리를 자른 이유는 ‘탈코르셋 운동’때문이었다. 그런데 머리 하나 자르는데 그리 고민하고 겨우 잘라서 파마를 한 것이 웃기지 않는가. 그렇게 나는 파마한 투블럭 숏컷을 하고 꽤 잘 어울린다며 좋아했다. 

2019년 봄, 중학교 3학년. 내가 미쳤었지.

분명 몇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숏컷이라 칭하는 머리를 하고 잘 어울리는지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그러다 문득 ‘왜 나는 머리를 잘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머리를 관리하고 잘 어울리는지 보는 것은 애초에 머리를 자를 필요가 없었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머리가 길어서 자르러 갔을 때에는 짧게 머리를 깎고, 거울을 보지 않았다. 그렇게 지금까지 나는 짧은 머리를 하고 살고 있다.

*

나는 지방 청소년 레디컬 패미니스트이다.

시위가 있으면 전혀 가지 못하는 지방학생신분이지만 그래도 머리를 자르고 브래지어를 버리고 화장품을 깨고 연애를 하지 않고 소비총파업에 참여하고 비혼을 결심한다. 하지만 이런 나의 노력과 열정을 한번에 식히는 것은 내 주변의 내 또래 친구들이 ‘그런 애들이 제일 먼저 시집가더라’라고 말하는 것과 ‘머리 길었을 때가 훨씬 예쁜데. 왜 잘랐어? 기를거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여성으로서 어쩜 그렇게 사람 맥이 탁 풀리게 말을 하는지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친구들은 내가 정말 쉽게 머리를 자르고 비혼을 결심하고 브래지어를 착용하지않고 화장을 하지 않는 줄 안다.

나는 내 개인을 위해서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 폭행당하지 않기 위해서, 강간당하지 않기 위해서,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 내가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을 친구들이 이해하지 못할 때 현실이 너무 정확하게, 아플만큼 선명하게 보여서 슬프다. 

친구들을 책망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니까. 그렇다고 성인들을 욕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도 모두 피해자이다. 이렇게 수많은 편견과 차별 속에서 피해를 받으며 살게 길러진 사람들이 바로 ‘여성’이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요구한다.폭행하지 않고, 강간하지 않고, 살해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우리가 우리의 기본적인 인권을 요구하는 것이 건방진 페미년 소리를 들을만큼 잘못된 요구일까.

여전히 남자들은 성매매를 하고, 불법촬영을 하고, 성희롱하고, 성폭행하며 그것이 전혀 잘못된 일인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연예인이 여성에게 성폭행 • 성추행을 해도 그들을 가장 먼저 쉴드 쳐주고 보호해주는 것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우리나라 사회를 정말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버스를 탈 때 내 근처에 남자가 서있으면 불안하고, 지하철에서 내 양옆에 여성들이 앉아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 남자랑 단둘이 타면 불안해진다.이런 마음을 남자들이 단 한번이라도 느껴본적이 있을까.

여전히 아빠와 오빠는 여성가족부가 왜 있니, 여성전용주차구역이 왜 필요하니, 세계여성의 날이 왜 있니, 이거 다 남자 차별하는 것이다 라며 기도 안 차는 소리를 해댄다.

*

화장실을 갈 때 마다 휴지로 구멍을 막는 것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될 줄 몰랐다. 

하루는 친구들과 노래방을 가서 화장실을 갔는데 칸 안에 온 구멍이란 구멍은 다 휴지로 막혀 있어서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 화장실에 와서 불안에 떨었을까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나왔다. 더 이상은 이렇게 구멍을 막지 않아도 맘 편하게 화장실을 갈 수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머리가 짧아서 남자인줄 알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꾸미지 않는다며 혼이 나지 않아도, 언제 어디서 찍힐까 불안에 떨지 않아도, 김치녀 된장녀라고 욕먹지 않게 조심하지 않아도, 브래지어를 하지 않았다고 욕먹지 않아도, 불공정한 일에 소리를 높여도 불이익받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 

사람답게 살고싶다.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런 것이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무엇이 16살 학생에게 이런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시민에게 이런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여성에게 이런 이야기를 쓰게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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